지난번 배틀쉽의 쿵쾅쉭펑 때문에 탄탄한 스토리가 너무나 고팠던바, 이번 영화는 '헝거 게임 : 판엠의 불꽃'.
이 녀석의 원작은 수잔 콜린스의 The Hunger Games(2008), Catching Fire(2009), Mockingjay(2010)으로 이어지는 헝거 게임 트릴로지의 첫 권이다. 이 책은 영화사가 얘기하는 것처럼 뭐 해리포터의 뒤를 이을 레벨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워낙 잘 팔렸다는데 최소한 기본은 하겠지라는 믿음으로 고른 것이다.
... 아, 트와일라잇도 엄청 팔렸었지.
그렇다고 지금부터 책을 읽어보고 영화를 보러가기엔 너무 늦다. 책 값이 영화표 값보다 싼 것도 아니고. 그래서 책은 됐다 치고 영화만 놓고 보면, 미국에서는 개봉한지 한달째 3억 250만 달러의 흥행 성적에 지금도 주간 박스 오피스 1위를 달리고 있어, 대략 이미 해리포터와 스파이더맨급의 성적 이상을 거둔 것이다. 나름 괜찮은 영화란 뜻이 아닌가?
... 아, 트와일라잇도 막 3억씩 벌고 그랬었어.
그렇지만 5월 1일이 되면 피땀흘려 모은 포인트를 소멸시키겠다는 메가박스의 협박 편지에 가슴이 콩닥콩닥한 나는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헝거 게임의 표를 예매하고 말았다. 포인트 8천점을 사용해서 살 수 있는 건 평일 표 뿐인데, 월화수목보다 천원 비싼 금요일 표도 8천점이 아닌가. 그렇다면 금요일에 봐야지! 그렇게 대목인 금요일 저녁에 극장에 갔는데... 사람이 별로 없는 가운데, 드문드문 외국인들이...
책을 전혀 읽지 않은 상황에서 본 영화이기 때문에, 원작의 세밀한 재현이니 뭐니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어떤 평도 할 수가 없다. 그냥 영화만 가지고 얘기해보겠다.
미국이 어찌어찌하다보니 캐피톨과 12개 구역으로 나뉘고, 같은 나라 안에서 제국 주의 시절 식민지 마냥 착취 당하던 각 구역들이 반란을 시도했다가 유혈 진압된 후에 다시 그런 생각을 못하게 하기 위해서 매년 구역마다 2명씩 제비 뽑아 24명을 모아놓고 헝거 게임을 개최하게 되었단다. 영화 극초반 집중하기 힘든 상황에서 훅 설명하고 넘어가서 그런건지 왜 이 게임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건지 이해가... 유력자 자제를 데려다가 상수리 제도나 기인제처럼 인질 정책을 운영한다면 모를까... 아무 집 애들을 데려다 배틀 로얄을 하는데 왜 반란이 억제가 되지? 배경 설정이 제대로 전달되기도 전에 휙휙 지나가다니.
암튼 햇수로 칠십몇년째 이걸 하다보니 뽑힐지도 모를 때는 덜덜덜 하다가 뽑혀간 사람 죽어 가는 걸 보면서는 또 즐기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이상하다. 하긴 1년에 전국에서 24명, 그 중 23명 사망 / 1명 로또 당첨인 리얼리티 쇼니까 로마시대 콜로세움부터 이어온 전통 엔터테인먼트이긴 함. 단, 자발적 참가가 아니라 뽑기라는 것이 비상식적이지만 1년 23명 사망이라는 확률은 다른 사고로 인한 사망에 비해 훨씬 낮은 확률이니 우매한 민중에게 그런 것이 와 닿을리가 없지. 오히려 더 낮은 확률의 1년 1명의 로또 당첨이 23명의 죽음을 덮고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 미디어의 힘인 거겠다.
암튼 그래서 1,2지구 같은 동네는 로또를 노리는 엘리트 살인 기계를 육성해서 대회에 내보내 종종 우승을 한다는데, 10,11,12지구 같은 저기 컴컴한데는 그냥 뽑기 선수 선발로 매번 베이스 깔아주는 형편. 그런데 이번 대회에 헝거 게임계의 김연아 캣니스 에버딘이 12지구에서 우리 민족의 종특인 활을 들고 혜성같이 등장. 잠깐, 근데 자원자가 얘뿐이라고? 1,2지구 살인 기계들은 뽑기운이 너무 좋은건가??
자의로 타의로 끌려온 24명의 참가자, 곳곳에 카메라를 설치해놓고 게임을 관찰하는 운영자, 죽음 아니면 로또의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게임으로 이루어진 헝거 게임의 구조는 이름도 비슷한 일본 만화 '라이어 게임'과 유사한 면이 많은데, 안타깝게도 헝거 게임에서는 라이어 게임처럼 서로서로 뒤통수 치는 치열한 심리전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다. 캣니스는 근본이 착한(? 그보단 순진한?) 사람이라 남을 쉽게 믿는 편인데, 그렇게 믿어주면 한 번 쯤은 배신을 해주는게 인지상정이건만 그런 것도 전혀 없다. 어디 그 뿐인가, 나중에 입장 곤란해지지 말자고 미리미리 죽어주기까지. 반면 적들은 팀을 짜도 너무 쉽게 분열하고, 결국 살아남을게 뻔한 주인공을 제외한 나머지는 순탄하게 죽어간다. (그 중 최고는 딸기)
대신 극 중에선 헝거 게임을 잘 모르는 캣니스를 가르치는 멘토와 코디를 통해 기본이 살육전인 헝거 게임에서의 성공을 좌우하는 것이 겉으로 보이는 신체 능력, 서바이벌 지식보다는 인상적인 이미지 관리, 스토리 텔링, 그로 인한 스폰서 획득 같은 매니지먼트 요소란 걸 애써 강조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이런 것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시키면 불쇼나 하던 캣니스가 나중에는 대중 선동에 날조 러브 스토리까지 동원해서 운영자 엿먹이고 우승까지 하는게 아닌가! 이런 점은 라이어 게임의 '참가자 vs 사무국' 구도와도 유사하지만, 캣니스는 서로 못 잡아 먹어 안달인 다른 참가자들 사이에서 그걸 혼자 이용해먹고 말기 때문에 여전히 이야기는 심플하고 러브 스토리 일부는 뜬금없기까지 하다. (빵집 아들만 불쌍)
이런 이유로 책의 높은 평가에 비해서 영화의 스토리는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다. 첫 편을 제외한 해리포터 영화가 항상 그랬듯, 책 한 권 내용을 영화 한 편에 다 우겨넣기는 역시 쉽지 않은가 보다. 142분의 긴 러닝타임으로도. 스토리가 고팠던 나는 헝거 게임을 보고 나서도 여전히 헝그리하지만, 후속작이 기다려지진 않는다.
점수는 5.5/10.0 미묘함.
CG, 의상, 분장, 미술도 화려하지만 미묘.
잔인한 장면은 카메라가 하도 흔들려서 제대로 안 보임. 역시 PG-13
+ 이 글을 쓰고 난 다음에 헝거 게임의 초반 30페이지 정도를 읽어보았다. 못 사는 사람에게 확률이 왜 그들 편이 아닌지나, 빵집 아들과 캣니스의 플래시백의 의미, 어째서 캣니스는 엄마에게 그렇게 모진가 같은 것들이 훨씬 이해가 잘 됨. 앞으로 볼 사람들은 책을 조금이라도 보고 가는 것을 추천한다. 책을 다 읽고 영화를 봤다면 점수가 확연히 달랐을 듯. May the odds be ever in your favor.